16 NOV 2014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진개제. 소리나는 정원 복실이


질문하나. “이야. 저 친구 저것 하나는 끝내주게 하네…”, “어머 어머 저것 좀 봐 우와 예술이야.” 라고 말할 때의 예술은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지금 저 친구라는 작자가 무언가를 지독하게 파고들어서 그야말로 끝내주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과히 ‘예술’이라고 하는 과한 상찬은 그것의 장르적 속성에서라기보다는 어떤 한 개인의 지독한 쟁이적 기질을 두고 하는 것이리라.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정원이 그러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라는 케케묵은 유행가 가사를 가슴 한구석에 꾸욱 눌러 담고 오늘도 빌딩 숲을 오가는 대부분의 우리들 형편에서 자연이라는 것은 그저 막막할 때 하늘을 쳐다볼 때 그리는 그 무언가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정원이라고 하는 것을 그다지 가까이 두고 만들고 즐기는 문화가 우리에겐 없다. 우선 땅이 없고, 돈이 없다. 정확히는 정원을 누릴 만한 분들은 도시 한복판 타워팰리스라는 하늘 위에 ‘떠서’ 살고, 돈이 없는 분들은 교외에서 땅을 ‘일구고’ 산다. 이런 이율배반이 있나. 우리나라에서 정원이 문화가 되기 어려운 가슴 아픈 스토리이다. 하물며 예술? 오우 댓츠 노노.

사실 이 땅에는 정원을 만드는, 끝내주게 만드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아마 그들은 오늘도 어딘가의 현장에서 돌 하나 놓고 나무 하나를 만지고 심는 데에 심혈을 기울일, 재야의 고수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과 내공이 양지로 나올 순 없다. 대부분 누군가의 담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작업들이기에 그러하다. 하기야 상황이 이러다 보니, 뜻있는 여러 단체에서 정원과 관련된 행사들을 하고 다양한 홍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 정원을 문화로 갖자는 외침들이다. 그러나 저들 역시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을 캐치로 내걸고 있다.

서두가 몹시 길었다. 나는 정원을, 조경설계를 하는 사람이다. 아르코와는 관계가 그다지 가깝지 않았던 직군에서 그저 평소에 위와 같은 고민들을 가지고 활동하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국민소득 4~5만 불 수준의 나라들에서 정원을 만들고 즐기는 것이 문화가 되고 나아가 예술이 된다는 것을 보고 배우며 익혀왔던 것들이 정작 내 나라 내 땅에선 만들어지기 어려우므로, 에라 외국에서 한번 내 이야기를 해보자 라는 심산에 캐나다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가든페스티벌에 디자인을 출품하였고,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지난 6월 말 캐나다 현지에 작품을 설치하였다. 작품 이름은 〈소리만드는 정원 콘가든 복실이〉.

소리를 만드는 정원이라니? 정원에 웬 소리? 아니다. 조경이란 걸 넓게 보면 땅에다가 무얼 하는 행위이므로, 다양한 의지와 욕망이 잡탕밥처럼 한자리에서 멋지게 비벼지는 것이지, 결코 단순히 나무 심고 돌 놓는 것 만은 아니다. 정원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만드는 정원이라는 발상은 요컨대 다양한 미디어를 한자리에 아우르는 어떤 것을 마음에 품다 보니 나타나게 된 콘셉트로, 궁극적으로 이 아이는 그 스스로 이용자들이 만지는 것에 반응하여 소리를 만드는 인터액티브 미디어가 되는 셈이다.

잠깐, 이 ‘아이’라고 했다. 이것은 정원인데 ‘아이’이다. 그리고 이름은 ‘복실이’이다. 왜 흔히 듣는 정원만의 이름들이 있지 않나. 승지원, 이화원, 바람의 정원, 쌈지마당, 맞이마당 등등… 글쎄, 무언가 어렵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공통적으로 전부 ‘장소’를 칭하는 이름들이다. 내가 만드는 것이 장소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친숙한 어떤 것이 되고자 한다면 이름부터가 뭔가 좀 달라야 할 것 같고 ‘아예 이참에 거꾸로 마구마구 발랄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욕심에 정원의 이름을 ‘복실이’라고 지어버렸다. 마침 복실이는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 이름이다. 쓰다듬고 만지고 계속해서 사랑을 주고받는 귀여운 어떤 것. 그것이 정원이 되면 안 되나? 장소(place)를 만들고 정작 거기에 대상(object)의 이름을 지어버리는 것이 어쩌면 그동안 복실이를 지켜본 많은 분들에게는 신기했나 보다. ‘복실이는 뭐냐, 대체 이름이 왜 그렇게 지어진 거냐?’라는 질문을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던지셨을지 모르겠다. 그냥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름이 주는 친근한 느낌이 좋았어요!

복실이의 몸체는 러버콘이라는 공사현장에서 매일 보는 메터리얼로 만들기로 한다. 가만 보면 이것은 현장이 시작되면 가장 처음 들어오는 건설 현장의 필수 아이템이면서 또 공사장을 내내 지키다가 제일 마지막에 철수되는 이를테면 현장의 파수꾼 같은 존재이다. 문득문득 러버콘을 볼 때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환경을 지배하고자 하는 어떤 욕구가 있다면 마치 이것이 그러한 개발하고자 하는 욕망의 아이콘이 아닐까? 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 실상 이 러버콘 ― 트래픽콘이라고도 하는 ― 을 가지고 만든 작업의 1탄은 2012년 서울시에서 주최한 takeurban72의 이벤트에서 시작됐다. 당시 굉장히 적은 예산과 3일 만에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한계 안에서 일찍 끝내놓고 쉬자는 작전을 극단에 밀어붙인 결과 찾게 된 시스템이다. 러버콘을 뒤집어서 그것들끼리 케이블타이로 연결하여 큰 지형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번에는 한 발 더 나아가 러버콘이라는 지극히 인조적이고 대량생산된 재료가 정반대로 지극히 러프한 재료인 자연을, 다시 말해 그동안 서로서로 배격하고 멀리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던 것, 파괴하고 파괴당하던 것이 다시 함께 한자리에서 비벼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수백 개의 러버콘들이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동산을 만든다. 뒤집혀져 땅에 박힌 채로 하늘을 향해 대포와도 같은 수많은 입을 열고 있는 인조적인 지형, 자 이제 중요한 건 이런 형태 안에 무엇을 어떻게 담느냐가 관건이 되겠다. 이미 콘이 거꾸로 설치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이 안에 무언가를 담겠다는, 혹은 말하겠다는, 그 자체로 이미 강력한 기호작용을 하고 있으므로 그러하다. 작가가 의도하든 않든 간에 형태 스스로가 만들고 있는 이 기호, 그렇다면 나는 그 기호에 부응하여 무언가를 더해야만 하는 새로운 의무가 생기는 법! 지시하는 것과 지시되는 것의 거리가 짧을수록 울림은 큰 법이겠지. 군더더기 없는 전달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로 압축이 되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언덕이라는 테마를 이용하여 그대로의 자연을 담는다. 두 번째는 땅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울림통이라는 이야기를 이용하여 소리를 담아본다.

애초부터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던, 환경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인 이 아이들이 이제는 거꾸로 뒤집어져서 흙을 담는, 자연이 새로 자라나게 하는 플랫폼이 되도록 한다. 인공과 자연, 개발과 보존이 마치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오랫동안 서로 반대 방향만을 쳐다보며 옥신각신해왔지만, 이제 한 자리에 함께 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충돌의 이미지를 연상하며 필요한 식재계획을 해간다.


디자인을 만들어 놓고 보니 거대한 울림통, 혹은 우퍼 같은 것이 땅에 그대로 심어진 듯하다. 혹시 가능하다면, 이것이 아마도 정원이자 동시에 거대한 크기의 악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침 2013년 ‘이것도 악기일까요?’라는 EBS 다큐프라임의 제작팀과 더불어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과 함께 장기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들과 함께 디지털-아날로그를 오가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재미있게 참여하며 적지 않은 공부를 하게 된다. 사실 조경가는, 일하다 보면 때로는 단순히 ‘미디어 월’이라고 설계도서에 집어넣기는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전혀 모르지 않나?

참으로 재미있고 신나는 경험이다. 악기에도 일가견이 없는 조경가가 이제는 어떤 악기로 소리를 낼까 고민하며 낙원상가를 마치 길거리 캐스팅에 나선 제작자의 심정으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훑으며 돌아다닌다. 앗. 이거 뭐예요? 이것도 악기인가요? 아 이거요, 이렇게 흔들면 웅웅 소리가 나요. 검색해보니 스프링드럼이라고 하는, 그야말로 이것도 악기이다. 원통의 한쪽은 열려 있고, 다른 한쪽은 막혀있는데, 얇은 플라스틱판으로 막혀있는 이 한쪽 면은 그 판의 한가운데에 꽤 기다란 강철스프링이 매달려 있다. 원통을 흔들면, 매달린 강철 스프링이 아래에서 흔들리게 되는데, 그 길이가 충분히 길기 때문에 원통을 작게 움직이더라도 그 아래의 스프링은 오랫동안 진동을 지속하게 되고, 그 진동이 고스란히 플라스틱판을 흔들리게 하여 소리를 만드는 원리이다. 우우우우웅…하는 마치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같은 소리가! 

캐나다로 출국하기 전까지의 나날들은 바로 이 소리를 어떻게 하면, 최대한 자연과 가깝게, 재질들 간의 간섭을 최소화하며, 또 러버콘의 자중을 그대로 이용하여, 사람이 만지고 앉을 때의 에너지를 소리의 발생 기작에 이용하는가를 탐색하던 시간들이었다. 자 이제 캐나다로 출국이다. 우리의 짐에는 공구가방이 한 개 있었는데, 끌, 망치, 전지가위, 보수제와 접착제, 전지가위, 특수제작 강철스프링과 자석 등등으로 가득한 일종의 우리만의 보물상자였다. 이 아이들은 이제 사전에 보내준 설계도면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 현지의 현장팀과 만나서 함께 설치되게 될 것이다. 현장에서 실제로 해보니 마치 트램펄린처럼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요란을 떨면서 바람소리를 연출하는 적절한 강도의 스프링을 만들어서 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여기서 잠시 캐나다의 정원 페스티벌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해 소개하도록 한다. 복실이가 설치된 레포드 가든 페스티벌은 북미의 중요한 예술정원박람회 중의 하나로, 외국에서 이미 유명한 켄 스미스, 마이클 반 발켄버그, 디아나 발모리 등의 스타급 조경가들의 작품도 함께 출품되어있다. 일부는 이미 영구전시 중인 것으로 아직도 그들은 무시 못 할 아우라를 뽐내고 있다. 레포드가든, 혹은 Grand-Metis 가든이라고도 불리는 이 거대한 정원은 수십 년 동안 레포드 가문의 영토였던 것을 현재의 알렉산더 레포드가 정원으로 조성, 일반인에게 개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페스티벌 사이트와 정원 사이트 두 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서로 분리관리 되고 있는데, 우리 같은 작가들은 서로 모여 페스티벌 사이트에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다가 잠시 땀이나 식힐 겸 정원 사이트로 들어가 카페테리아에서 망중한을 즐기기도 한다. 굉장히 아름답고 세심하게 관리된 정원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참 부럽다는 생각은 당연히 따라오는 부러움인가? 이런 쉬운 게 우리나라에선 쉽지 않다. 용인자연농원도 이제는 에버랜드가 되었고… 정원을, 자연을 향유하는 일상의 즐거움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르고 믈이지...사람은 흙에서 왔는데 말이지

지리적으로 레포드 가든이 위치한 곳은 Mont-Joli라고 하는 퀘백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1년 중 절반 이상이 혹독한 겨울이다 보니, 거꾸로 나머지 절반은 굉장히 서늘하고 청명한 공기를 자랑하다. 그러다 보니 유럽의 부호들이 여름철에 시간을 보내려고 가지고 있는 거대한 별장들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년의 단 몇 달을, 단지 쉬러 오는 것을 목적으로 거대한 별장들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 작은 마을의 경제적 기반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 정원문화의 뿌리는 결국 유럽에 있는 것 같다. 불과 몇 달이 채 안 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더 아름답게 보내기 위해 캐나다의 땅에서 즐기는 정원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그들! 그 중심에는 알렉산더 레포드가 있지만, 그의 노력과 열정을 지지하는 많은 민간 후원가들과 캐나다 문화관광부의 강력한 지원이 또한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레포드 가든이 위치한 곳은 Mont-Joli라고 하는 퀘백시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1년 중 절반 이상이 혹독한 겨울이다 보니, 거꾸로 나머지 절반은 굉장히 서늘하고 청명한 공기를 자랑하다. 그러다 보니 유럽의 부호들이 여름철에 시간을 보내려고 가지고 있는 거대한 별장들이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년의 단 몇 달을, 단지 쉬러 오는 것을 목적으로 거대한 별장들을 여러 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이 작은 마을의 경제적 기반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 정원문화의 뿌리는 결국 유럽에 있는 것 같다. 불과 몇 달이 채 안 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더 아름답게 보내기 위해 캐나다의 땅에서 즐기는 정원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그들! 그 중심에는 알렉산더 레포드가 있지만, 그의 노력과 열정을 지지하는 많은 민간 후원가들과 캐나다 문화관광부의 강력한 지원이 또한 이를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다. 마침내 완공이 되었다. 캐나다 현지의 방송국에서도 촬영이 오고, 여러 가지 인터뷰를 통해 작품의 아이디어와 복실이라는 이름의 숨겨진 진실도 알려준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경험은 이러한 작가의 설명보다는, 직접 이 콘가든을 만지면서 즐기는 일반 이용자들의 모습이다. 눕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이쪽에서 저쪽을 향해 소리를 치기도 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정원을 즐긴다. (어린 시절 컵을 가지고 장거리 통화를 했던 놀이를 연상하며 남은 콘을 사용하여 이쪽에서 저쪽을 연결하는 소리전달 경로를 만들어서 심어놓았다.) 그들도 아마 처음 보는 지형일 것이다. 이상한 빨간 지형인데, 이게 풀도 있고, 내가 만지면 소리도 나온다니!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여기는 행복한 모습을 보니 참으로 흐뭇하다. 인조적인 소재이지만 결국은 정원을 함께 만들고 있는 러버콘. 어찌 보면 복실이는 그 시스템과 구조의 덕에 힘입어 어디에서든지 설치가 가능하고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지대로 된’ popup garden이다. 살짝 pop art스러운 pop up garden일까?

서두에서의 장황한 설명은 어찌 보면, 정원이 예술이어야 한다는, 다양한 장르가 한자리에 어우러지기에 가장 적합한 판이 결국은 땅이고, 그 땅을 매만지는 조경가가 예술의 동네에서 활동하고자 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장황한 넋두리를 늘어놓은 것으로 여겨주시면 감사하겠다. 개인적으론, 한국의 조경가로서, 한국의 정원이 그 자체로 문화가 되어 해외의 유력 페스티벌 행사에 초청되어 작품을 설치했다는 데에 보람을 가진다.


(라고 썼습니다. 아르코의 부탁을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