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APR 2014

디자이너에게 그림이란?


라이브스케이프의 영문캐치프레이즈는 designers for the raw desire입니다. 직역하자면  '날 것들의 욕망을 위한 디자이너들'이 되겠군요.


'디자이너designer는 디자이어desire의 인칭대명사이다.'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창조자의 열망과 욕망을 다시 한번 되짚으며 외부특강을 할 때 클로징멘트로 애용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철없을 때는 그런 욕망이 지나쳐서 주변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아픈 기억도 있습니다만 디자이너에게 이런 창조자로서의 행복한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러므로 디자이너에게 그림이란, 단순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representation의 수단으로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완성되면 이런 모습이 될 겁니다'라는 표현의 도구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디자이너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자기보정, 내적인 욕망을 외적인 조건에 맞추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밟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트레이싱지를 사용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트레이싱지를 위에 올리고 아래의 선을 트레이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래의 선을 기준 삼아 새로운 가능성을 계속 건드려보면서 앞으로 나갑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트레이싱지에는 가장 간단한 선만 남게 됩니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있는 이것이 개념선이 됩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다시 아래로 세포분열을 하면서 내려가는 거지요.

물론 아이디어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한 그림을 그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는 지극히 드문 경우인 것 같습니다. 디자인을 만들어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representation의 도구로서의 그림보다는 내 아이디어를 진행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사용하는 데에 익숙하다 보니 완성품으로서의 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열중하지 않는 단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테크닉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손으로 생각한다는 표현이 이럴 때 딱이지요. 크로키를 할 때 15초정도 이내에 그림의 구도와 표현하는 바를 정하고 완성해나가야 하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상의 보여주고 싶은 것들만 드러나게 하는 것. 디자인에서도 내 의지가 명료하게 드러나게 하는 선들이란 점에서 같은 이치이겠네요.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는 것도 역시 디자이너에게 그림이 주는 작은 기쁨입니다. 무심코 컵 손잡이를 귀처럼 여겨보고 그러보았지요. 새로운 이야기로 상상의 나래를 펴봅니다.

그려본 크로키 중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이쁜그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쁜 것이 이 그림의 가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왠지 모델의 앞 팔 앞다리. 뒷팔 뒷다리가 전혀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도록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더 잘 마무리 했겠지만 이런 류의 그림들은 그때 당시의 의지와 의도들이 선명하게 담겨져 있어서 언제 다시보아도 새로운 기분입니다.

아마 세 번째 자화상이었던 것 같은데, 파스텔로 슥슥...벌써 십년 전의 그림입니다. 어리고 거침없고 발랄하고자 했던 시기입니다. 이렇게 저에게 그림은 설계가로서 구상안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을 너머 디자이너로서의 욕망을 표현하는 가장 기초적인 매체입니다. 글보다 한참 앞서 가슴을 흔드는 어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