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세계 5위 게이머
스
정말 싫었지만 그 시간은 어찌 됐든 버텼던 것 같아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한 회사에서 3년에서 5년 정도는 일단 버텨야 하는 것 같아요. 그 정도가 되면 그 급에 맞는 일종의 졸업장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3년 쯤 되면, 회사도 ‘아 얘는 이런 걸 잘하는구나’,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하는 걸 알아요. 그때부터 조금씩 기대치가 달라지죠. 요즘은 그 텀이 훨씬 짧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진짜 길었어요. 그 시기를 나름 ‘수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버텼던 것 같아요.
햇
정말 말 그대로 인내의 시간이네요.
스
그런데 모르겠어요.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어떤 사람은 그 조직에 잘 맞아서, 금방 인정받는 경우도 있고. 근데 나는 그 회사라는 조직하고는 별로 안 맞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 데까지, 한 3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햇
그래도 되게 잘 버티셨네요.
스
아니,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그냥 회사에서 뽑힌 신입이니까 “뭐 한 번 해봐라” 이런 것들이 많아요. 나는 내 성향상 아뜰리에 건축사무소에 갔으면 참 좋았을 것 같은데, 대형 회사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까 정말 하루 종일 캐드만 잡고 있었죠. 그때 내가 농담처럼 “캐드질이야 이건... 계집질, 서방질, 도둑질 같은 캐드질이다”라고 말하곤 했어요. 스스로의 일에 부정적이었죠.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 솔직히 말하면 상상하던 건축가의 삶과는 달랐어서 좋았던 기억은 없어요. 물론 학교 다니면서 알바도 많이 했고, 캐드도 빨랐어요 내가. 그 시절엔 캐드가 막 도입되던 때라, “얘는 빠르니까 기계적인 일은 다 시켜도 되겠다” 약간 그런 식이었죠. 그래서 더 싫었어요. 신입한테 무슨 디자인을 시키겠어요? 내가 디자인을 특별히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때 당시에 회사엔 진짜 대단한 선배들이 많았어요. 나는 그냥 발끝에 붙은 발톱처럼, 조용히 열심히 버티는 그런 신입이었죠ㅋㅋㅋ그 시절엔 정말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요.
햇
꽤 오랜 기간동안 회사에서 버티면서 정말 하기 싫으셨을 때는 없으셨어요? 일 말고 다른거에 빠졌다거나 그런 거요.
스
아 당연히 있죠. 이야기가 좀 근데...그 무렵에 아셈 무역센터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미국 회사 SOM이 기본계획을 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다니던 회사를 포함해 네 곳이 컨소시엄을 만들어서 실시설계를 했어요. 그 시절엔 프로젝트가 워낙 크고 설계기간은 짧았어서, 패스트트랙이라고, 정말 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이었거든요. 발주처에서 아예 “다 모여서 한 사무실에서 같이 일해라” 해서, 지금으로 치면 턴키 프로젝트처럼 합사 사무실을 만들어버린 거죠. 그게 어디였냐면, 무역센터 건물 옥상 위. 가설 건물을 지어놓고, 거기서 몇 년을 일했어요. 나는 근데 거기를 자원해서 갔어요. 이유는 그냥 현장이랑 가까이 있고 싶었어요. 그때는 그런 생각이었죠. 터파기부터 바로 옆에서 보고 싶고, 진짜 ‘건물이 세워지는 걸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 사실 위에선 정말 웃겼겠죠. 신입이 이런 소리를 하니.. 그때 우리 본부장님이 내 말을 듣고 “아유 일할 놈도 없는데....그래 가라 가!” 하시더라고. 그래서 진짜 그렇게 가게 됐어요. 그렇게 삼성동 현장에서만 한 3년 정도 있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 일도 그렇게 재밌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제가 그때 몰입을 했던 일이 게임이었어요. 스타크래프트가 나오기 전이었는데..
햇
그 컴퓨터 게임에 몰입을 하셨다는 거죠?
스
그렇지 그렇지. 그때는 지금이랑은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어요. 막 인터넷 망이 깔리기 시작하던 시절이어서 플로피 디스크로 작업하던 때예요. 참 옛날이다 아아아. 그런데 우리가 워낙 큰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으니까, 서버나 네트워크 같은 게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도입된 현장 중 하나였죠. 그 시절에 ‘모터 레이스 2’ 라는 PC 게임이 있었는데, 요즘처럼 온라인으로 전 세계 유저랑 연결돼서 하는 네트워크 게임이에요. 1990년대 초중반에 그런 게 가능하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제가 또 승부욕이 좀 있잖아요. 그 단순한 레이싱 게임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 그때 홈페이지 서버에 접속하면, 세계 랭킹 5위까지가 메인 화면에 뜨는데 “저기엔 꼭 내 이름이 올라가야겠다” 싶었어요. 결국 진짜로 5위 안에는 항상 있었어요. 그게 레이싱 게임이니까 거의 0.01초 차이로 들어오는 거예요. 1등부터 5등까지는 거의 동시에 들어와요. 정말 말 그대로 손끝 싸움이었죠.
햇
그렇죠 그렇죠.
스
그거를 점심시간이랑 쉬는 시간만 되면 그걸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우리 동료들이나 선배들이 야, 얘는 모터레이스 귀신이다 그러고. 게임 대회 같은 거 하면 내가 회사 대표로 나가서 다 깨고 막 이랬어요. 그때 정말 키스킨이 다 찢어질 정도로 열심히 하고 옆에서 선배들이 응원하고 그랬었죠.
햇
ㅋㅋㅋㅋ대표님 정말 집념이 대단하셨네요.
스
그래서 내가 이제 3년 정도 지나 이제 복귀를 했는데, 회사에서 이제 게임 천재가 된 거죠. 그때 뭔가 이 캐릭터가 잡혔죠. 그 전에는 좀 쩌리였는데 그 대형 조직에서 하나라도 잘하는 게 생기니까 관심을 받더라고요.
햇
그게 건죽도 아니고 게임인거네요.
스
그렇지. 당시에 난 술도 잘 못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제 한 3년 지나니까 그때부터 디자인도 시키시더라고요. 또 당시에 내가 했던 몇 디자인을 우리 본부장님이 보셨을 때는 좋았나 봐요. 그 이후부터는 인정도 받고 기본 계획 단계에서 일을 조금씩 맡아서 했죠. 내가 또 그림을 이따금 쉭쉭 그리니까 좋아했던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