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말한다 8


너=변하지 않음. 푸르름=나무
나=변함. 보잘 것 없음 =집

나무와 집은 그림의 반대편에서는 어떻게 만나고 있나.

지평선이 집의 왼쪽 처마선 아래로 들어가 있다. 우리가 쉽게 따올리는 ‘집’의 심볼이 당시에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집의 표준프로파일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유는 나무가 심겨진 지평선이 그보다 낮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억지일까? 전체 그림을 놓고 다시 보자.

왼쪽의 지평선과 오른쪽의 지평선. 하나의 선이 아니다. 오히려 높이와 볼륨이 각각 오르락 내리락하며 집의 윤곽을 규정하는 데에 충실할 뿐이다. 오른쪽에서의 지면이 그러했던 것 왼쪽의 그것 역시 이번에도 그 향태의 속성은 집이라는 기호를 드러내는데 충실하도록 그 위치와 모양이 선택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하나의 화면안에 다양한 공간과 차원을 담는다. 마치 피카소의 그것과 같다. 한술 더떠서 두개의 주제가 끊임없이 대립하여 서로의 차이를 극렬하게 드러낸다. 주제는 감사와 우정일진 몰라도 그림속의 기호들은 서로 대립한다.

겸재는 구상을 그렸지만 추사는 추상을 그렸다. 저푸른 소나무와 함께 내가 백년해로하는 풍경이 아니라 이런 나와 그런 너. 상대성을 그린 것이다. 끊임업이 매 순간마다 드러내고 있는 것은 유일하게 이것. 너와 내가 이리도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대립이. 충돌이 감흥을 만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했으면 하는 것은 이렇게 밝혀낸 것들의 사실관계가 아니다. 내가 찾아낸 그림의 원리가 맞으면 어떨것이고 틀리면 또 어쩔것인가. 중요한 것은 오로지 대상들의 차이에 주목하고 그그것들을 주변의 것들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는 것 만으로도 우리의 공부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얼마뒤에 상세하게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테니 이제 정리한다.

세한도. 유명하다.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도 당연하게 아 이그림 유명하다. ‘제자의 변치 않는 우정에 감사하여 감사의 글 하나 써주고 화면이 허전하니 슥슥 그려서 준거다.’ 라거나, 혹은 ‘…에이 추사 김정희라니까 서체가 워낙 유명해서 다 그렇게 여겨주는 거지 뭐. 이 그림? 뭐 유명하대. 머 그렇대…라나 뭐라나.’ , ‘ 그렇다니 좋은 건가봐 아 나무는 제자구나. 집은 자기고. 그래 알았네 알았어…’

머 이렇게 이야기자고 하면 김은 빠지지만 그닥 할말은 없다. 다만. 애시당초 우리가 원통해 했던. 창작의 과정에서 굳게 닫혀 있다는 그놈의 블랙박스를 해독해 나는 길이 혹시 이 방법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런 해독이 역으로 우리의 창조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숱한 밤을 세워도 내 디자인을 설명하지도 못하겠고. 답사여행을 다녀도 가이드 교수님이 이야기 해주시는 먼나라 이웃나라 역사 야사 비화 등등에 끼워 맞추어서 작품을 이해하고 돌아오는 그 비생산적인 작품 읽기, 혹은 허세반 클리쉐반으로 떡칠 범벅이 된 말하기 좋아하는 비평가연 하는 젊거나 늙은 꼰대들앞에서 아무런 할말이 없는 빈 주먹의 디자이너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제 긴 연재를 위한 대충의 밑자락은 깔아 놓은 듯하다. 조금 더 긴 호흡으로. 하나의 작품을 풀어 볼 시간. 다음은 선유도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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