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말한다 6

아마도 줄거리를 시간이 흐르는 순서대로 배치하자면 이렇게 되리라. 
1. 깡패가 있다. 

2.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3. 사람답게 살고 싶다

4. 그러다 죽었다. 

5. 가족들은 슬퍼했고

6. 시간이 흘러 잊혀진다. 
깡패가 죽고. 사람들은 슬퍼하고. 시간이 흘러 또 잊고 살아간다는 이야기. 사건을 서술하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순서로 이야기한다. 이게 정상이다. 
그렇지만 감독은, 잊고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가장 비참하고 비통한 순간의 앞에 배치한다. 
시간을 거스른 편집
처참한 슬픔의 감정은 그 행복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남은 자들의 표정과 충돌한다. 의미는 차이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어두운게 있으므로 밝은게 드러나고. 시끄러움이 있기에 고요함이. 쌍스러운 것이 있기 때문에 성스라운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클라이막스에서 감독이 사용한 방법이 바로 이’차이’이다 (영화적으로는 꼴라주기법이라 함)
이런 이치는 또다른 영화적 장치, 사운드에서도 발견된다. 분명. 상훈이가 벽돌로 두드려 맞을땐 시끄럽고 거친 소리들이 꽉 채워져 있다. 그렇지만…바로 다음, 콜라쥬로 삽입된 일상의 장면들에서 모든 소리들은 뮤트되어 있다. 이 억제된 소리들은 다시 비통의 대목을 만나면서 통곡의 고함으로 살아난다. 시끄러움의 앞에 고요함이 있으면 시끄러움의 의미는 그것이 무엇이 되든 강조되게 마련이다.

조금 더 나아가 보자. 일상의 장면과 비통의 장면이 엇갈리는 마지막 콜라쥬에서 웃는 얼굴의 방향. 그리고 그 다음 장면. 우는 얼굴의 방향. 

같은 방향을 바라 보되 표현되는 감정의 차이.

남자배우와 의미적 대립을 만드는 여주인공의 방향변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나 둘 셋. 

그리고


넷에서 터진다 


그리고 지워지는 얼굴. 기승전결의 표정배치. 머랄까 먹먹하다. 마치 다음 장면을 위한 쉼표일까. 


가까이 가고 싶었으나 함께 하고 싶었으나. 결코 그러지 못한. 영화 카피가 떠오른다. 핏줄은 엿같다. 참으로 똥파리스러운 결말.
똥파리. 제목 마음에 든다. 영화의 제목이나 표현하고자 하는 상징이 그렇게 대단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위의 몇줄이 영화의 의미라면 정작 중요한것은 그 의미를 드러내는’일이 아닐까?
우리는 유독 의미에 과잉집착하는 경향이 아주 많이 몹시 꽤 있다. 대부분 내세울 것이 없는 경우가 그러하다. 선 두개 긋고 연결성 극대화라고 하든지. 커뮤니티의 회복. 효율성 극대화. 동북아 무역도시의 거점. 한류문화네트워크의 허브. 등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는 허브나라다. 허브만 있고 스포크는 없다. 모든 동네가 허브로만 이루어진다.) 표상하고자 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의 차이. 상징이 대단해서 대단한것이 아니다. 상징을 드러내는 구성의 힘. 그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디자이너의 본령이기도 하다.
우리의 건축공부 디자인공부 조경공부 그림공부 전부 다 마찬가지인데. 대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같은. 이러하니 좋지 아니한가. 당대의 대가가 만들었는데 이런 비하인드스토리가 있다지 아니한가를 공부하게 되는 것. 그것이 디자인을 역사로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머… 괜찮다. 
그런데. 디자인을 생산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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